고정된 건축물이 없는 구석기시대에도 크로마뇽인은 질서 있고 기능적인 주거 공간을 구성했다. 이 글에서는 크로마뇽인의 ‘마을’이라 부를 수 있는 집단 거주 구조와 각 공간의 용도, 집단생활의 흔적을 통해 인류 주거 문화의 기원을 살펴본다.
돌로 짓지 않아도 공간은 존재했다
현대의 마을은 도로, 주택, 상점, 공공시설로 구성되지만, 수만 년 전 구석기 시대를 살았던 크로마뇽인에게 ‘마을’이란 개념은 조금 달랐다. 이들에게 마을이란 돌담과 지붕이 아니라, 안전하고 기능적인 공간의 배치였으며,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구조였다. 크로마뇽인은 유랑하며 살아가는 이동형 수렵채집인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적 발굴 결과, 일정 기간 머물며 생활했던 집단 주거지가 분명 존재했으며, 그 구조는 결코 무질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굴 안에서도 공간이 용도별로 구분되어 있었고, 동굴 밖에서는 임시 거처나 텐트형 구조물이 나란히 배치된 흔적도 발견되었다. 프랑스와 체코 등지에서 발견된 유적에 따르면, 하나의 공간에는 취사 흔적이 집중된 중심 화덕이 존재하고, 주변으로 사냥도구, 식재료 가공 장소, 수면 공간 등이 구분되어 있었다. 중심부에는 불을 피워 채광과 보온을 확보했고, 출입구 근처에는 도구 보관이나 가죽 처리 같은 작업이 이뤄졌다. 이러한 구획은 마을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질서 있고 반복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처럼 마을의 개념은 꼭 돌이나 벽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크로마뇽인은 주변 환경에 따라 주거 공간을 구성했고, 공동체 생활을 효율적으로 이어가기 위한 분업과 공간 분리를 실현하고 있었다. 이는 인류가 정착생활 이전부터 ‘생활공간의 설계’라는 개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주거 공간 구성과 기능적 배치
크로마뇽인의 주거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자연 동굴을 이용한 정주형 주거지, 둘째는 텐트형 이동식 구조물, 셋째는 강가나 숲속의 오픈형 야영지 형태다. 이들은 기후, 자원 접근성, 안전성 등을 고려해 적절한 유형을 선택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중심 화덕’의 존재다. 불은 단순히 취사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 기능을 했다. 불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몸을 녹이며 휴식을 취했다. 따라서 불 주위에는 수면 공간이 반원형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작업 공간과 주거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석기를 만드는 작업은 아이들과 노약자가 머무는 공간과 떨어진 외곽에서 진행됐고, 가죽을 벗기거나 뼈를 다듬는 공간 역시 위생과 냄새를 고려해 따로 떨어진 장소에 위치했다. 이는 기능과 효율, 위생이라는 개념이 이 시기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쓰레기 처리 방식이다. 주거지 주변에는 의도적으로 쌓은 듯한 뼈 더미나, 폐기된 도구 조각 무더기가 발견된다. 이는 쓰레기를 단순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역에 모아두는 ‘관리’ 개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의 ‘공용 구역’ 또는 ‘폐기물 처리장’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동물 뼈나 도구의 배치 형태를 보면, 가족 단위 혹은 소규모 무리가 일정 구역을 차지하며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구역은 부분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중심 불 주변에서 이어지는 형태로 구성되어,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 구조를 형성했다. 이는 마을의 초기 형태로 충분히 볼 수 있다.
마을은 건물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크로마뇽인은 벽돌도, 지붕도 없었지만, 분명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의 마을은 구조물이 아니라 관계와 기능, 협력의 구도 위에 존재했다. 공동체가 모여 하나의 공간을 나누고, 역할을 분담하며,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구조를 갖춘 것.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마을이었다. 그들의 마을은 변형 가능했다. 기후가 바뀌면 위치를 옮기고, 위험이 닥치면 형태를 바꾸며,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조화롭게 공존했다. 오늘날 도시 개발에서 고려해야 할 유연함과 환경 친화적 사고방식이 이미 이 시기부터 실현되고 있었다는 점은 놀랍다. 인류의 정착은 농업의 시작과 함께 본격화되었지만, ‘공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크로마뇽인의 마을 구조는 그러한 고민의 실마리를 제공하며, 우리가 공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돌로 쌓은 벽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갔는가이다. 크로마뇽인의 마을은 그 질문에 가장 오래된 답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와 마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